[이호선*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사랑의 온도는 100℃가 아니다
우리가 오래 살면 다 지쳐요. 또 오래 살면 지겹고, 무감각해집니다. 그건 사랑이 식은 게 아니에요. 사랑은 늘 뜨거운 온도로 생각하니까 식은 것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중요한 게 우리가 많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정으로 산다. 의리로 산다. 우린 전우애야.” 이런 얘기하잖아요. 사랑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친절함이라고 부르고요. 누군가는 고마움이라고 부르고요. 누군가는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에 별일 없었어.” 이걸 우린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또 다른 의미로 재미 삼아 부르는 게 ‘의리’ 였던 거고, 재미 삼아 불렀던 게 ‘평생 웬수’ 이렇게 불렀던 거거든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런데 저는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온도도 살짝 변하고 그 이름도 살짝 변하고요. 시간이 흐르면 눈도 나빠지고 또 청력도 잘 안 들리잖아요. 사랑도 그렇게 눈에 비치는 것도 달라지고, 귀에 들리는 것도 달라지는 거거든요.

유물 발굴하듯 찾는 '우리의 좋았던 추억'
그런데 분명한 건 나이 들어서 이혼도 할 수 있고 졸혼도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부부 사이에 있었던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역사를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집집마다 다르죠. 고통의 절댓값은 본인의 것이니까 지금까지 겪어왔던 과거를 돌아보면 정말 안타까운 인생, “내가 왜 이 사람은 계속 사나?”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어요.
결혼을 하신 분들이라면 이 모든 관계 속에 고통이 얼마나 크게, 또 얼마나 자주 자리 잡았는가 한 번쯤 돌아보게 되잖아요. 생각하면 지난 건 다 고통이고, 남은 건 한숨 같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에 우리에게는 어떤 좋은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유물을 발굴하듯이 찾아내야 해요.
인간의 뇌는 아주 방어적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인지하고 다음번에 그 고통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이걸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여기에 일차적으로 반응하게끔 되어있는 게 인간이 뇌예요. 그래서 기쁨은 순삭이고 고통은 영구하거든요. 그래서 제일 먼저 기억하실 것, <우리에게는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요.
두 번째로는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끔 한 힘은 무엇일까?> 이걸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해요. 가끔 사람은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과거에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나를 나답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우리의 어떤 것이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 생각하지 않는 분들 많이 계시거든요. 되게 중요한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얼굴이 잘생겨서 여기까지 올 수도 있어요. 이 사람이 음식을 너무 맛있게 해서 여기까지 왔을 수도 있어요. 이 사람은 친절에서 왔을 수도 있어요. 아이들의 엄마로서, 아이들의 아빠라서. 때로는 이 사람은 돈이 많아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걸 모아서 다 뭐라고 부르냐면 <최악의 순간에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사람만의 장점>이라고 저는 얘기를 해요. 이 사람의 희로애락을 다 보고 앞뒤 좌우 가려가면서 못난이 지점도 다 보면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10년, 20년, 30년, 40년, 수천 세월 지나면서 부부가 계속 서로를 지켜보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이런 모든 지점에 이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그래도 이 인간이 또 이건 있어.’ 이게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런 거 하나 없으면 오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뭐냐면, 그 사람들이 나를 견뎌주었다는 거예요. 나만 견딘 게 아니고요. 그 사람도 나를 견뎌주었다는 걸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볼 땐 이 사람이 결점투성이인 사람인 것 같지만, 어쩌면 그건 내 눈동자의 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이 사람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사람, 나에게는 고통만 주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도 그에게 칼날을 들이대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들도 있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때로 '자식'때문에 살죠. 자식 때문에 살 때에도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 돼요. 왜냐하면 아이들의 DNA 속에는 반드시 내가 가장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그 사람의 절반의 스토리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거든요.
부부사이의 <희로애락> 중에 어떤 게 가장 많이 기억나는지 그것부터 먼저 살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희’가 잘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로’가 많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애’가 정말 나를 점철하는 단어가 되기도 하고, ‘락’이 이야기 중심에 있기도 하거든요. 근데 우리는 이걸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마치 볼록 렌즈처럼 한 부분이 크게 보일 뿐이에요. 그럴 땐 렌즈를 잠깐 내려놔야 합니다. 렌즈를 내려놓으면 역사 속의 우리는 ‘희’를 발견하게 될 거고, 그 세월 속에 ‘락’을 발견하게 될 거고요. 우리가 ‘희’와 ‘락’만 있나요? 가만히 살펴보면 ‘애’와 ‘로’도 발견할 겁니다.
갱년기, 부부에게 중요한 시기
갱년기가 된다는 건 ‘다시금 한 번 더 반복’한다는 겁니다. ‘갱(更)’이라는 게 [개선한다] 이런 의미도 있을 거예요.

부부관계는 갱년기 때가 가장 위태롭고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돌아본 그 세월 속에 이 사람은 나에게 누구였는가를 물어보는 아주 절호의 시기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남자, 내가 알고 있던 그 여자, 이미 늙어서 흰머리가 있고, 머리는 숭숭 빠지고…. 그리고 알고 있던 그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바뀐 그 모든 순간에 <희로애락>의 순간을 딱 가져가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냐면 고마움이 생겨납니다. ‘아, 이 사람이 이런 지점에 나를 참아줬구나.’ ‘이 사람이 이런 지점에 정말 최악의 순간이었는데도 그래도 버텨 줬구나.’ ‘형편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돈은 벌어다 줘서 우리 애들 키울 수 있었구나.’ 이렇게 작고 큰 고마움의 순간들이 나타나거든요.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한 기여도도 생각나게 될 겁니다. ‘아, 이때 이 사람이 했던 그 많은 것 중에 이 순간 진짜 고마웠어.’ ‘이 사람이 없었으면 그때 딱 나서줘서 그때 우리 집이 살았잖아.’ 요런 순간들. 아이를 키우고 어려운 순간, 시댁 식구와의 어려운 순간, 또 처가와의 어려운 순간에 내 아내가, 내 남편이 그 순간에 나에게 어떻게 해줬는가? 이런 수많은 이야기가 다 뭐냐면 일련의 ‘기여’들이에요.
우리가 사는 게 다 소소해요. 인간은 원래 소소하잖아요. 그 소소한 내 인생사에 작고 큰 기둥이자 버팀목이 돼줬던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 해준 기여점이거든요. 이런 기여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 한 지점만 딱 집어서 “그때 당신이 이렇게 해줬잖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 같아.” 이 한마디 말로도 우리는 앞으로 남은 부부생활 30년, 40년, 50년의 역사를 또 한 번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또 한 가지, 갱년기가 된다는 건 위태로움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때 이혼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이혼하는 분들이 보면 몇 가지 특징들이 있어요. 먼저 “이혼해!” 라는 말 많이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에 완전히 몰입해서 타인을 완벽한 가해자로 만듭니다. 생각해 보면 상대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죠.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지점으로 넘어가면 거기서 헤어 나올 길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말씀 드릴게요. 부부싸움을 할 때도 기술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셔야 하냐면, <우리의 싸움이 이혼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라는 걸 기억하셔야 해요. 부부싸움을 할 때에도 반드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길에 들어오셨다는 걸 기억하고, 우리의 목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확전해서는 안 되고요, 서로 얘기하고 있는 이 사람의 말하는 투나 장단점이 지금 이 싸움의 핵심 주제하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살펴보셔야 해요. 그래서 때로는 조금 기분 나쁘고 때론 주제를 잃은 순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누군가 하나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같이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주제를 잘 찾아내는 것, 굉장히 중요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