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숫자와 도표의 숲으로만 본다면, 사회보험은 그저 납부율과 급여율의 교차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금만 고개를 들어보면, 사회보험은 한 사회가 서로를 위해 얼마만큼 기다려 주기로 약속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 앞에서 늙음과 병, 실직과 사고, 돌봄의 긴 밤을—각자도 아닌, 함께—견디는 법을 매일 연습한다. 그 연습의 이름이 사회보험이다.
사회보험의 기원은 낭만이 아니라 상처이다. 공장과 철도, 광산과 항만에서 노동이 기계의 속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던 날, 인간의 뼈와 폐, 허리와 손목이 먼저 부서졌다. 독일에서 산재보험이 제도화된 순간은, 위험을 개인의 운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으로 묶어버린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 이후 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장기요양보험이 차례로 붙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너의 예측 불가능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예측하겠다.”
민간보험과 사회보험의 차이는 단순한 사업자 유형의 차이가 아니다. 전자는 가능성에 가격을 매기는 계약이고, 후자는 불가피성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약속이다. 그래서 사회보험은 강제이고, 권리이며, 평균의 언어를 쓴다. 소득에 비례해 내지만, 아플 때 받는 처방은 계급을 모른다. 이 평범한 사실 하나가 사회를 조금 덜 잔인하게 만든다.
연금은 ‘노후’라는 단어의 무게를 사회가 분담하는 장치이다. “더 내고 더 받자”는 말은 숫자 싸움 같지만, 실은 세대 사이 신뢰의 재건축을 겨냥한다. 문제는 공학이 아니라 윤리이다. 오늘의 현역이 내는 보험료는 내일의 노인이 되는 ‘나’에게 돌아온다. 이 단순한 순환이 작동하려면, 제도는 투명해야 하고, 예외는 적어야 하며, 거짓말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충분히 늦지 않게” 고친다는 정치의 시간감각이 뒤따라야 한다.
건강보험은 우리가 병을 시장가격으로 호명하지 않겠다는 합의이다. 영국의 NHS가 보여준 것은 무상의 숭고라기보다 예방의 경제학과 필요의 우선순위였다. 한국은 사회보험 방식으로 다른 길을 택했다. 민간 의료의 역동성과 공적 재정의 그물을 겹쳐 쓰는 길이다. 여기서 기회와 함정이 동시에 생긴다. 보장성은 넓혀야 하고, 공급은 왜곡 없이 유인해야 하며, 공공의료의 기초체력은 꾸준히 키워야 한다. “많이 낸 사람이 더 좋아야 한다”는 소비자 논리와 “누구나 필요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시민 논리가 부딪칠 때, 우리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질병은 소비가 아니라 위험이라는 초심으로.
산재보험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일하다 죽지 않게 할 것, 다치면 끝까지 책임질 것.” 중대재해처벌법은 복수의 도구가 아니라 예방의 기술이다. 처벌을 두려워해야 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무사히 퇴근하는 풍경이 기업의 최소 윤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작은 사업장과 파편화된 하청 고리에 위험이 몰린다. 법의 문턱을 낮추고, 안전 투자를 비용이 아니라 자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회계와 금융의 언어까지 손봐야 한다. 안전은 선의가 아니라 설계에서 나온다.
고용보험은 소득이 끊기는 순간에 존엄이 함께 끊기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장치이다. 실업급여를 악용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그 사실은 제도를 정교화할 이유이지, 제도의 목적을 거꾸로 세울 명분은 아니다. 더 중요한 전선은 다른 곳에 있다.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 간헐과 다중직업의 시대에 “고용”의 범주를 재정의하는 일이다. 누구의 소득이 ‘노동소득’인가를 넓게 묻고, 납부와 급여의 연결고리를 유연하게 설계해야 한다. 실업을 사후에 메우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직·재훈련·경력전환을 제도의 중심으로 끌어와야 한다. 미래의 일자리는 기술이 만들겠지만, 재기의 경로는 정책이 만든다.
장기요양보험은 돌봄을 가족도, 여성도, 선의도 더는 혼자 떠안지 않게 만드는 사회의 선언이다. 돌봄이 위기와 동의어가 되어선 안 된다. 제도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첫째, 수급자에게는 연속적이고 통합된 서비스를, 둘째, 돌봄노동자에게는 숙련이 보상되는 노동시장을 보장해야 한다. 장기요양과 건강보험의 견고한 경계를 시민에게 전가하는 방식은 가장 쉬운 방식이지만, 가장 비싼 비용을 남긴다. 경계를 행정이 아니라 사람의 여정에 맞추어 다시 그려야 한다.
이 다섯 제도는 각각의 섬이 아니라 하나의 군도이다. 연금의 소득보장, 건강보험의 치료, 산재의 예방과 보상, 고용보험의 전환, 장기요양의 돌봄이 서로를 보완할 때, 사회는 비로소 파도에 강해진다. 제도 간 데이터와 재정, 심사와 평가를 ‘사람 기준’으로 묶는 통합 거버넌스가 다음 단계의 과제이다. 각 부처의 칸막이는 내부 효율의 언어로는 타당할지 모르나, 시민의 하루라는 언어로는 종종 불합리하다.
사회보험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납부율을 올릴 것인가, 급여를 조정할 것인가, 대상과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잊지 말아야 할 기준이 있다. 첫째, 가장 약한 고리에 먼저 닿는가. 둘째, 사람을 더 빨리 도와주고, 더 적게 모욕하는가. 셋째, 내일의 위험을 오늘보다 작게 만드는가. 숫자는 이 세 질문을 설명해야 하고, 정치는 이 세 질문에 책임져야 한다.
사회보험은 도덕 강론이 아니라 현실주의의 장치이다. 인간은 늙고, 아프고, 해고되고, 다치고, 돌봄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그 사실을 공동의 재정과 규칙으로 받아 적는 지성이 사회보험을 움직인다. 우리는 여전히 미완이다. 그 미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개혁의 첫 단추이다. 더 투명하게, 더 넓게, 더 일찍—그리고 무엇보다, 더 인간답게.
마지막으로 사회보험의 문장을 다시 쓴다. “나는 너의 위험을 나의 위험으로 간주한다.” 이 문장이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각 가정의 불안이 국회 예산서의 숫자와 실행지침의 문장으로 변해야 한다. 제도는 결국 문장으로 시작해 예산으로 증명되고, 현장의 판단으로 완성된다. 사회는 그렇게, 서로의 내일을 조금씩 인수한다. 그것이 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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