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서비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종종 지도를 떠올린다. 강물처럼 흘러야 할 길이 군데군데 끊겨 있고, 어떤 다리는 반쯤만 놓여 있다. 사람들은 그 틈을 자기 몸으로 메우며 건넌다. 누군가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출근길을 서너 번 꺾고, 누군가는 우울을 달래줄 상담실이 집과 정반대편에 있어 하루를 다 써버린다. 제도라는 이름의 다리들이 사람의 시간을 축내고 사람의 품위를 갉아먹을 때, 복지는 목록이 아니라 사과가 되어야 한다. 잘못 지은 설계에 대한 사과, 뒤늦게 도착한 지원에 대한 사과, 낙인으로 흘린 눈물에 대한 사과. 그 사과의 문장으로부터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가 ‘사회서비스’를 사업명으로 외울 때, 정작 놓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도움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도움을 받는 자와 주는 자를 가르는 언어는 늘 손쉽다. 그러나 그런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가족의 잠 못 이루는 밤, 이태원 이후 길 위에서 멈칫하는 발걸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느라 스스로의 삶이 부서져 가는 자녀의 침묵. 이 장면들 앞에서 사회서비스는 시혜의 기술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기술이 된다. 버티되, 한 사람의 하루를 갈아넣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의 시간표를 조금씩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문제는 관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대상’으로 부른다. 아동·장애인·노인. 필요한 분류이지만, 순서가 거꾸로다. 먼저 시민이고, 그다음이 조건이어야 한다. 아동은 미완의 주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시민이고, 노인은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시간을 먼저 건너온 선배 시민이며, 장애는 결함이 아니라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이 순서를 바로잡는 순간, 신청주의와 자산조사의 굴욕은 줄어든다. 제도가 “당신이 정말로 가난한지 증명하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묻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문턱이고, 후자는 문이다.
전달체계라는 단어는 딱딱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간단하다. 한부모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알코올 치료를 받으러 가는 그 동선이 끊기지 않게 하는 일. 행정이 사람에게 맞춰 움직이는가, 아니면 사람이 행정의 칸막이에 몸을 비틀며 들어가는가. 좋은 제도는 항상 같은 원칙을 따른다. 가까울 것, 단순할 것, 예측 가능할 것, 그리고 말이 통할 것. 통합성·지속성·접근성·책임성이라는 교과서의 네 단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사람의 하루 안으로 들어갈 것.”
바우처는 한때 그 하루를 넓혔다. 이용자는 선택권을 얻었고, 기관은 서비스의 질을 경쟁해야 했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같은 유혹을 품는다. 단가를 낮추고, 인력을 줄이고, 서류로 ‘좋아 보이는’ 서비스를 만든다. 그래서 공공은 관찰자가 아니라 균형추여야 한다. 사회서비스원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표준 노동조건을 세우고, ‘싼 돌봄’이 초래할 비싼 후유증을 막기 위해서다. 이를 다시 시장으로 되돌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반복해야 한다. 자유는 무엇을 전제로 가능한가. 좋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는 이름뿐인 자유다.
나는 보편의 미덕을 숫자보다 경험에서 배웠다. 아동수당이 상위 10%를 걸러내던 시절, 우리는 선별 자체가 얼마나 많은 비용과 오해, 낙인을 낳는지 보았다. 어떤 가정은 서류 한 장에 막혀 혜택에서 멀어졌고, 어떤 부모는 소득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계급으로 분류되는 느낌을 견뎌야 했다. 그 불필요한 절차를 덜어내자 제도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보편은 낭비가 아니라 신뢰를 만드는 방식이다. 신뢰가 쌓이면, 사람들은 제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유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세금은 벌금이 아니라 약속의 분담금이 된다.
예산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다. 사회서비스는 일자리이기도 하고, 그 일자리의 품질이 곧 서비스의 품질이다. 숙련과 헌신에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돌봄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정책은 아름다운 말과 비어 있는 계산식의 조합에 불과하다. ‘싸고 빠른’ 돌봄은 결국 느리고 비싼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 공공이 최소선이 아니라 기준선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기준선이 높아질수록 민간의 혁신도 진짜 혁신이 된다. 얇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두꺼운 전문성으로 경쟁하게 된다.
결국 핵심은 절차의 전환이다. 위기는 먼저 돕고 나중에 확인해야 한다. 생존과 안전, 돌봄은 선지급·후검증의 원칙에 놓여야 한다. 접점은 하나여야 하고, 그 문을 통과하면 필요한 제도들이 뒤에서 자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은 사정을 열두 번 반복하지 않아도 되게, 행정은 서로의 데이터를 신중히 나누되 이용자에게 열람과 정정, 이동의 권한을 보장하게. 투명성은 통제의 도구가 아니라 신뢰의 조건이다.
사회서비스가 잘 작동하는 사회에서 시민은 덜 불안하고, 국가는 덜 요란하다. 정책은 현수막이 아니라 조용한 예측 가능성으로 느껴진다. 나는 그 상태를 ‘존중의 일상화’라고 부르고 싶다. 한 아이가 점자 교재로 수업을 따라가고, 한 노인이 동네에서 후배 시민을 가르치고, 한 장애인이 보조인의 도움으로 이전과 다른 일을 택하되 삶의 질은 바뀌지 않는 것.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복지가 지향해야 할 미학이다.
어떤 사회가 성숙했는지를 가늠하는 잣대는 거창한 성장률이 아니다. 낙인 없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가, 절차가 사람의 속도를 따라오는가, 도움이 권리의 언어로 말해지는가. 우리는 그 세 가지 질문에 동시에 ‘예’라고 말할 때에만, 비로소 서로에게 덜 잔인하고 더 믿을 만한 공동체가 된다. 사회서비스는 그 ‘예’를 매일의 문장으로 유지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을 더 잘 익힐수록, 우리는 제도의 나라를 넘어 사람의 나라에 가까워진다.
새벽에 강의 듣는다고 일어나서는 학우님이 올려주신 이 글이 교재를 정리하신 것인지는
몰라도 참 뼈저리게 읽게 되네요. 맨날 알파벳만 보다가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