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자원의 이해
선사시대의 문화
1.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로 사냥과 채집생활을 하였으며,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였다.
2. 신석기 시대에는 간석기를 사용하면서 농경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며, 그 이전에도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등이 사
용 되었다.
3.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민무늬 토기로, 미송리형 토기, 송국리형 토기, 팽이
형 토기 등이 사용되었다.
고분
1.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고인돌, 돌널무덤,돌무지무덤,널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주구묘 등 다양한 무덤이 사용되었다.
2. 고구려는 돌무지무덤을 만들다가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화된다.
3. 백제의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 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굴식 돌방무덤, 벽돌
무덤 등 다양했으며 영산강 유역에서는 옹관 분구묘와 전방후원형 고분까지 만들어
졌다.
4. 신라는 마립간 시기에 특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을 사용하다가 점차 굴식 굴방무덤으
로 변화하며, 통일 이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왕릉형식이 채용되었다.
5. 발해는 굴식 돌방무덤인 정혜공주묘와 벽돌무덤인 정효공주묘가 특징적이다.
사찰과 사찰 건축
1. 사찰은 인도 당시에는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하여 수행과 포교의
역할을 다하였다. 이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찰의 위치 및 역할이 다양해졌다.
2. 사찰 건축물은 불교 교리에 따라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의거하여 배치된
다. 수미산을 오르는 여정에 배대하여 각 사찰 건축물이 위치하고 사찰 건축물은 각
각 그에 맞는 상징과 의미를 지닌다.
3. 사찰 건축물은 배치에 따라 산문에 이르기까지 사찰 초입의 건축물(극락교,하마비,당
간지주 등), 산문(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과 누각, 법당, 탑.석등.부도.비,
사찰 대중의 생활공간(요사채)등으로 구분된다.
4. 극락교, 하마비, 당간지주 등은 불법승 삼보가 함께하는 성스러운 공간인 사찰을 찾
는 이에게 마음 다스리는 역할을 하며 사찰 초입에 위치한다. 극락교 등의 다리는
부처님 세계로 가는 다리이다. 하마비는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갖게 한다. 당간 및
당간 지주는 사찰의 깃발을 달던 곳으로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5.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등을 사찰의 산문이라고 한다. 특히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은 사찰의 삼문(三門)이다. 일주문을 시작으로 수미산을 오르며 금강문과 천왕
문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불이문을 거쳐 정상에 이르러 부처님 세계에 들어선다.
6. 불전 사물은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으로 각각 지옥 중생에서 하늘 중생(범중)
축생(법고), 날아다니는 중생(운판), 물에 사는 중생(목어)을 제도하기 위한 법구이다
7. 법당은 불보살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 법은 진리 또는 가르침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집‘, ’진리의 집‘이 된다. ’부처님의 집‘이라는 뜻의 불전이라고도 한다. 또 금당이라고
도 한다. 금색은 부처님을 의미하므로 ‘부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8. 탑은 부처님의 사리 또는 경전을 모시는 곳으로, 다양한 형태가 있다. 재료에 따라
석탑, 목탑, 전탑, 모전석탑 등으로 부른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으로 구분된다. 이때 탑신부 옥개석(지붕돌)의 수로 탑의 층수를 헤아린다.
9. 석등은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상징하고,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비는 부
도비를 비롯하여 사적비, 공덕비 등이 있다.
10. 요사채는 사찰 대중의 생활공간을 말한다.
불상과 법당
1.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많은 불보살이 등장한다. 첫째, 모든 중생이 부처님
성품 곧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많은 부처님이 있어야 하고,
수행과정에 있는 보살도 있어야 한다. 둘째, 중생의 요구와 이해가 다양하기에 그에
맞는 불보살도 많아야 한다.
2. 석가모니 열반 후 500여 년간은 무불상 시대로 불상을 대신하여 보리수, 법륜, 탑
등을 예배 대상으로 삼았다. 1세기 말엽 불신관의 변화와 불자들의 간절한 신앙의
염원이 어우러져 불상이 조성되었다.
3. 32상 80종호인 부처님 신체의 특징을 고려하여 불상에는 육계, 나발, 백호, 삼도,
수인, 광배, 화불, 좌대 등 신체적 특징과 구조를 나타낸다. 특히 선정인, 항마촉
지인, 여원인, 시무외인, 천지인, 전법륜인, 지권인, 아미타여래구품인 등의 수인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와 관련이 있다.
4. 불상에는 여래상, 보살상, 신장상, 나한상, 조사상 등이 있다. 불상이란 넓은 의미로
는 모든 상을 뜻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여래상만을 말한다.
5. 법당 현판에 따라 법당 중심에 모신 불보살이 다르다. 가령 대웅전은 석가모니불,
대적 광전은 비로자나불,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지장전은 지장보살 등이다.
고려시대까지의 궁궐
1. 궁(宮)이라는 한자의 처음 뜻은 일반 사람들의 집을 의미했지만 중국 진한대에 이르
러 황제체제가 성립되면서 궁은 황제 또는 황족의 집안을 지칭하게 되었다. 또한 궐
(闕)이라는 환자의 본래 뜻은 문의 양쪽에 망루처럼 높은 구조물을 세우고 그곳에
감시병들을 배치하여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건축물을 의미했다.
따라서 동양에서 궁궐이란 진한대 이래로 황제 또는 왕과 같은 절대 권력자의 거처
및 그 거처를 경호하는 경비시설을 지칭했다.
2. 약 3,000년 전에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청동기 문명이 확산되면서 정복과 피정복
이 빈발하고 그 결과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형성되었다. 청동긴시대의 집은 신석기
시대의 움집과는 달리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집에서 벽면과 지붕이 구분되기 시작
되었다. 그리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 즉 환호, 목책 등이 등장하였다.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집은 규모와 화려함에서 큰 격차를 보였다. 이런 경향은
철기시대로 접어들어 왕이 출현하고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3. 고대왕국이 형성되면서 왕의 거주지로서 궁궐이 형성되고 그 궁궐을 보호하는 궁성,
그리고 도성 전체를 보호하는 도성이 축조되었다. 또한 기원전 2~1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목조기와라는 새로운 건축기술이 등장했다. 기와와 함께 와질
토기도 발달했다.
4.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목조기와 건축은 궁궐과 사찰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그 와
중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목조건축 및 기와문화가 발달했다. 삼국시대의 궁궐은 중
국의 영향을 받아 외전과 내전으로 구분되었는데 외전에서는 통치활동이, 내전에서는
사적 생활이 이루어졌다. 이는 고려의 궁궐 건축에 그대로 이어졌다. 삼국시대와 고
려시대의 궁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이 다수 있었으며, 국가의례도 불교와 관련된
행사가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궁궐의 이해
1. 궁궐의 정전, 즉 외전은 왕의 통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조선시대의 왕은
유교 국가 조선의 통치권자로서 양반관료와 함께 국정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왕은 양반 관료를 양성, 선발하고, 그들과 함께 유교에 의한 왕도정치를 추구하였
다. 통치자로서 국왕은 내치와 외교에 종사하였다. 조선시대 왕은 <국조오례의>
라고 하는 유교적 규범에 따라 궁궐 정전에서 유교정치를 수행한 것이다.
2. 왕의 침전인 연침은 궁궐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침전의 공간구성 자체도 황극을
상징하였다. 왕의 침전은 기본적으로 우물 정(井)자 형태였는데, 이 우물 정자가
황극과 관련이 있었다. 즉, 우물 정자 형태로서 중앙의 방 하나와 이를 둘러싼
8개의 방으로 침전이 구성되었다. 중앙의 방은 황극이었으며 주변 8개의 방은
8괘를 상징하였다. 왕이 잠을 자는 방은 황극을 상징하는 중앙의 방이었다.
이같은 침전의 구조 및 이념은 경북궁의 강녕전만이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덕수궁의 함녕전 등 다른 궁궐의 연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 경복궁의 중전인 교태전은 세종 때에 건설되었다. 교태전은 천자의 정실인
황후는 6궁이고 제후의 정실인 왕비는 3궁리라는 유교 예법에 따라 좌우에
인지당과 함원전을 세워 강녕전의 3침과 짝을 이루었다. 교태전의 교태는
태괘 중의 ‘천지교태’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천지가 사귀는 것이 태’라는 의미
로서, 이것은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형상을 해설한 말이다.
‘천지교태’ 다음에는 “임금이 태의 도리로써 천지의 도를 이루고, 천지의 마땅함
을 도와 백성들을 좌우한다“는 구절이 이어진다. 왕이 태괘에 함축된 가르침을
잘 따르면 천지의 도를 이루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4. 대비는 왕의 어머니이다. 남편인 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왕으로 즉위하면
중전을 새로운 왕비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대비전으로 옮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비는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아침저녁으로 왕과 왕비의 문안인사를 받고
왕실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대비는 왕의 어머니이자 왕비의 시어머니로
서 나라의 큰 어른이었다. 그러므로 대비전은 중전 못지않게 크고 거느린 사람도
많았다.
5. 조선시대의 후궁제도는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 내명부 조항에 규정되었다.
<경국대전> 내명부 조항에 규정된 후궁은 빈 정1품, 귀인 종1품, 소의 정2품,
숙의 종2품,소용 정3품, 숙용 종3품, 소원 정4품, 숙원 종 4품이었다.
경국대전에서는 후궁의 정원을 고정하지 않았고 직무도 명시하지 않았는데, 왕의
첩인 후궁에 관계된 것은 왕의 가정생활에 속하기에 이 부분을 법으로 규정하기
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6. 조선시대 왕세자는 평균 8세 전후에 책봉된 후 동궁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대한제국과 경운궁
1.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을 단행한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기 위해 경운궁 수리
와 함께 경복궁의 명성황후 빈전에 모시고 있던 혼백과 시신 그리고 선원전에
시고 있던 어진들을 경운궁의 별전으로 옮기라 명령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경복궁
의 집옥재에 봉안했던 어진도 경운궁의 별당으로 옮기게 했다. 빈전과 진전을 옮
긴 후 고종은 경운궁에 자주 행차하여 신료들을 접견하는 등 경운궁을 활용하다가
1897년 2월 20일에 환궁하기에 이르렀다.
2. 고종이 환궁하기 직전 경운궁의 주요 건물은 임진왜란 이래의 즉조당, 대비와
세자빈의 거처, 고종이 외국 공사나 신료들을 접견하던 청목재와 대유재, 명성
황후의 혼백을 모신 경소전 등이었다. 정문인 인화문과 금천교가 있어서 외형
적으로는 기본적인 궁궐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환궁 직후부터 함녕전이 완성
되기 전까지 고종의 일상생활이나 업무는 대유재와 청목재에서 이루어지다가
함녕전이 완성된 이후에는 함녕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3. 고종의 일상생활이 영위된 함녕전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물은 정전인
태극전과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 그리고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다.
태극전은 임란 이후 선조가 귀경하여 머물던 즉조당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건물이었기에 대한제국기의 중요한 국가 행사는 태극전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경운궁으로의 환궁이 근본적으로 을미사변에서 야기되었기에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신 경효전이 중요하였으며,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 또한 고종의 정통
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였다. 이와 더불어 홍태후,태자, 태자비, 엄비 등이
거처하던 수인당, 동궁, 영복당 등도 중요한 건물이었다. 대부분 여성인 이들의
생활공간은 내전이었다. 이들은 시중들기 위한 환관과 궁녀들의 생활공간도 내전
에 자리했다.
4. 대한제국기의 경운궁은 몇차례 화재를 겪었는데 그중 1900년 10월의 선원전 화
재와 1904년 4월의 대화재가 가장 컸다. 고종은 선원전 화재후 곧바로 진전을 중
건하였고, 1904년의 대화재 이후에도 곧바로 중건에 착수하였다. 특히 선원전을
중건한 1900년 이후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3년 정도 지난 후로서 고종의 황제
권이 인정되어 있었다. 고종은 선원전 중건을 계기로 정전인 중화전을 건설하는
등 궁궐 규모를 확대하였다.
한옥과 마을
1. 한옥은 건물(채)과 마당으로 구성된다. 한옥을 이후는 채는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
조방식으로 구축된 구조물로 나무. 흙. 돌. 종이와 같은 자연재료로 짓는다.
한옥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의 채에서 온돌과 마루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2. 한옥은 여성공간인 안채와 남성공간인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 사당. 별당 등
여러채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채는 기본적으로 칸과 퇴로 구성된다.
3. 한옥에서는 다양한 성격의 마당이 조성되는데, 마당은 대개 채와 짝을 이룬다.
채의 풍부한 공간구성은 폐쇄적인 온돌과 개방적인 마루공간의 다양한 결합방식
에 기인한다.
4. 한옥의 주구조는 나무로 뼈대를 짜서 건물의 벽체와 지붕 등 구조체를 구성하는
목가구조이다. 가장 기본적인 가구 구성은 삼량집이며, 일반적 규모의 양반주택
은 삼량구조에 퇴를 덧붙인 오량집이다.
5. 한옥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건축이며, 배치와 공간구성, 처마 등의 요소를
통해 열 환경에 유리하도록 디자인된 환경친화건축이다.
6. 한옥의 아름다움은 선험적이고 절대적 미보다는 공간구성과 구조가 갖는 합목적
성이 꾸밈없이 드러남으로써 느껴지는 체험적 미에 기인한다. 곧 한옥은 합목적
적인 미학을 갖는다.
7. 한국의 전형적인 마을 유형은 씨족마을로, 마을 앞에서 뒤로 가면서 사회적 영역
개인적 영역, 의식 영역으로 구성된다.
8. 마을의 토지 이용은 주거지와 농경지, 주변 자연요소로 구분된다. 주거지는 대지
와 길, 그리고 대지 위에 놓이는 주택과 공동시설로 구성된다.
9. 한옥과 마을은 공간구조적 체계를 이루며, 이 한옥-마을 체계는 마을마다 일정하
지 않기 때문에 마을에 특성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한옥과 마을의 문화
1. 한옥에서의 생활방식의 특징은 생애주기와 생활공간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한옥의 공간이용은 성리학적 질서를 반영하여 위계성을 가지며, 융통성이 있어
다양한 활동을 수용한다. 또한 한옥의 공간은 확장성이 있어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이 가능하다.
2. 마을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어 오고 있는 현장이다. 한국 문화의 구체적인 양상
과 독장성 및 다양성은 서로 다른 마을을 비교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3. 훌륭한 문화자산인 한옥과 마을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특히 하회
마을과 양동마을에 깃든 유. 무형의 자산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한 한옥과 마을들에서 지역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전통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그것들은 훌륭한 문화관광의
대상이다.
4. 문화유산으로 가치있는 한옥과 마을은 본래의 가치와 품격을 유지하며 보전되어
야 하고 적절히 활용되어야 한다. 문화 유산의 보전에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음
을 이해하고, 보전과 활용을 양립하는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14강 조선시대 왕릉
1.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은 격심한 혼란에 빠져
들었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었고,
일본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격심한 내전을 치뤘다. 한국 역시 고려왕조에서 조선
왕조로 교체되는 혼란을 겪었다. 조선왕조는 14세기의 혼란을 거쳐 1392년에
건국되었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주도세력, 즉 신진사대부들은 500년간 지속된
고려왕조의 체제를 유교이념에 입각해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 전반이 유교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국가와 사회가 유교화되면서 가장
극적으로 바뀐 부분이 상장례이다. 화장과 49재등으로 대표되던 불교식 상장례
가 매장과 3년상의 유교식 상장례로 바뀐 것이다. 상장례가 유교화되면서 기왕
의 무덤양식이 변하였고, 그것이 왕릉의 변화까지 가져왔다.
2. 왕릉은 기본적으로 왕과 왕비가 살아생전 거주하던 궁궐과 같다. 궁궐을 짓기
위해 명당을 고르고, 궁궐을 보호하기 위해 궁성을 쌓고, 궁궐의 공간을 일과
휴식의 공간으로 나누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장엄하게 건물을 조성하였
듯이 왕릉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다만, 궁궐이 살아있는 왕과 비를 위해 지상
에 건설된 것에 비하여, 왕릉은 유명을 달리한 왕과 비를 위해 지하에 만들어졌
다. 지상의 궁궐은 산 자를 위한 양택이고, 지하의 왕릉은 죽은자를 위한 유택
인 것이다. 양택인 궁궐에서는 살아있는 자의 예법이 사용되고,유택인 왕릉에서
는 죽은 자의 예법이 사용되었다.
3. 왕릉은 원칙적으로 남향으로 만들었다. 살아생전 남면하던 왕의 지위에 맞게 왕
릉도 남향으로 하는 것이다. 왕릉은 세상을 떠난 왕이 머무는 곳이기에 왕의 시
신을 모신 매장영역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그 외의 지역은 지하에 묻힌 왕을 모
시기 위한 제향영역 또는 관리영역이었다.
4. 왕릉의 부장품은 지하에 묻힌 왕 또는 왕비가 유명세계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곡물 저장용구, 식기, 의복, 노리개 및 산사람이 드리는 선물 등인데, 이것을
명기, 복완, 증백, 증옥이라고 한다. 부장품의 종류 및 모양은 살아 있을때 사용
하던 기물과 같지만 생시의 기물에 비해 조금 작고 질박하게 만들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원찰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15장 한국의 근대건축
1. 근대건축은 유럽 근대사회의 출현과 함께 등장했다. 갑작스런 사회변동으로
과거의 양식을 재현하는 역사주의 건축이 일시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지만,
근대건축은 산업혁명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
고,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추론에 기반하여 구조를 채택했으며, 정연한 질서를
갖도록 기능을 배치하였다. 그 결과 공업기술이 우선시되었고, 역사적 양식의
재현은 점차 사라졌다. 나아가 건축양식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거부하고, 근대
적인 인간에게 합당한 건축으로 국제적으로 공통된 이념을 실현하며, 장식이
아닌 건축의 기능과 기계미를 강조하는 근대건축 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2. 한국 근대건축은 1876년 개항으로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능동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흘러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건축은 대자본과 신기술을 전제로 하기에 개항기에는 서양인,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3. 개항기 한국 근대건축은 서울과 개항장에 집중되었다. 서구 열강에 의한 공관
건축, 선교사에 의한 종교건축은 각각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종교적 상
징성을 내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하였고, 자국에서 사용한 형식, 재료,
기술등을 도입하였다. 잠깐이었지만, 대한제국기의 독립문, 정관헌 등에서 서양
의 형식과 기술을 나름대로 변용하기도 하였다.
4.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근대건축이 일제에 의해 주도되면서 궁궐을 위시한 전통
건축은 헐리거나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조선총독분 등 관이 주도하여 대규모
공공건축을 건설하였으며, 일제 지배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제국주의 건축물들
이 전국에 나타났다. 조선총독부, 경겅부청 등의 관공서,경성역 등 철도역 등이
대표적이다. 민간 상업 및 업무용 건축물 역시 일제강점 초기에는 관 주도 건
축과 비슷한 구조 및 외관을 보이다가 일제강점 후기에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합리주의 양식의 근대건축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건너온 우리나라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일제강점 후기에는 화신백화점, 중앙고
등학교 본관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5.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보
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을 등록하는 제도로, 근대건축을 포함한
근대문화유산의 보호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6. 한국 근대건축은 그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가 현재의 우리이다. 개별 근대건축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보존, 복원, 개조, 재활용, 이전, 철거 등
활용방식을 우리가 결정하게 된다. 천년의 역사가 당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
근대 건축은 그 평가기간을 길게 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
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질 않았네요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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