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는 대체로 “무엇을 얼마나”의 문제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제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설계의 문장부호들이다. 급여의 총량보다 수혜자 선정의 문턱, 현금과 현물, 바우처의 미세한 조합이 사회적 신뢰와 경제적 성과를 좌우한다. 좋은 의도가 늘 좋은 제도를 보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철학의 언어와 미시경제의 산술, 행정학의 조직감각을 한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비로소 복지국가의 손이 흔들리지 않는다.
복지의 첫 번째 전장(戰場)은 보편주의와 선별주의 사이에 있다. 보편주의는 시민권을 매개로 “조건 없는 권리”라는 언어를 세운다. 복지는 수혈처럼 모두의 혈류를 안정시키는 공공재적 성격을 지닌다. 낙인은 보이지 않는 비용이고, 그 비용은 취약할수록 더 비싸다. 선별은 언제나 증빙과 심사를 동반하고, 심사는 언제나 창구에서의 주저와 체념을 낳는다. 보편주의는 이 비용을 사전에 제거한다. 게다가 예방은 치료보다 싸다. 보편적 급여는 개인의 위험을 낮추고 집단적 리스크를 분산해 총비용을 줄인다. 행정비용의 관점에서도 장점이 있다. 까다로운 심사를 위한 관료조직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 “모두에게”는 때로 “덜 복잡하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선별주의의 논지는 간명하고 강력하다. 모든 사회에서 재정은 유한하고, 완전한 보편은 늘 정치적 허구에 가깝다. 따라서 우선순위는 긴급성과 심각성에 따라 배분되어야 한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이것은 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무차별 보편은 한정된 재원을 분산시켜 가장 취약한 이들의 몫을 지우개로 문지른다. 도덕적 해이와 남용의 통제 역시 선별이 없을 때 기계적으로 약화된다. 그러므로 보편주의의 윤리와 선별주의의 효율은 정답과 오답의 대립이 아니라, 한 사회가 선택할 균형의 좌표다. 어느 쪽에 기울든, 대답은 구호가 아니라 설계여야 한다.
설계는 곧 자격(criteria)의 집합이다. 가장 원초적 기준은 거주와 시민권이다. 영토 내 존재 자체를 권리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 거주기간·영주권·국적 등 법적 연락처를 요구할 것인가. 현실의 복지국가는 대개 후자를 택한다. 의료긴급을 예로 들면, ‘존재’만으로 무제한의 권리를 인정하기 어렵다. 여행자보험이라는 사적 장치는 바로 이 공백을 메우는 사회적 타협이다. 그 다음은 인구학적 기준이 뒤따른다. 노령, 장애, 아동—연령과 상태는 욕구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가늠하게 해준다. 그러나 “대략”일 뿐이다. 같은 65세라도 건강·가구구성·지역자원이 겹치면 삶의 기울기는 극적으로 달라진다. 숫자는 문지방이지, 서사를 대체하지 않는다.
기여의 논리도 있다. 사회보험료의 납부는 명시적 기여이고, 공무·군경의 희생은 사회적 기여다. 경제구조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정 직군—예컨대 농어민—의 역할을 ‘공공적 기여’로 인정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다만 기여 논리는 쉽게 자격의 귀족제를 유혹한다. ‘쌓음’이 ‘권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복지는 성취의 보상 이전에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공동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근로능력은 오래된 기준이자 자주 오해되는 잣대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노동할 수 있는 가난한 자를 규율의 대상으로 보았다. 근대 복지는 이를 권리의 언어로 전환해 왔다. 오늘의 질문은 “일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느냐”이다. 영유아 양육·돌봄 부담·교통·건강 등은 법적 능력을 실질 능력으로 환원시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다. 반대로 실업보험은 ‘근로능력이 있음’이 오히려 자격이 된다. 비자발적 실업은 시장의 실패이지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소득·자산조사는 선별제도의 심장부다. 선진 복지국가는 자산보다 소득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집과 자동차는 풍요의 상징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장보기 비용을 지불하지는 못한다. 절대빈곤선은 행정 편의와 근로유인의 측면에서 매력적이지만, 현실의 물가와 생활수준과 어긋나기 쉽다. 상대빈곤선은 사회적 통합의 감각에 더 부합하지만, 측정과 정치적 변동성을 수반한다. 다시 말하지만, 답은 해석이 아니라 설계다. 어떤 기준을 선택하든, 갱신주기·물가지수 연동·지역 가중치 같은 기술적 장치를 뒤따르게 해야 한다.
급여의 형태는 복지의 얼굴이다. 현금은 자유를 통해 효용을 극대화한다. 사람은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가장 잘 안다. 시장이 충분히 경쟁적이고, 정보가 넉넉하며, 개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온전하다면—현금은 가장 인간다운 방식이다. 물건을 나누어 주는 대신 돈을 건네는 일은 존엄을 보호한다. 계산대 앞에서 복지는 흔적을 지우고 개인은 시민으로 남는다. 행정비용도 낮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과점과 불완전 정보로 가득하다. 광고는 욕구를 생산하고, 수혜자의 일부는 합리적 선택을 수행할 역량을 제약받는다. 이때 현물은 강한 보호장치가 된다. 의료·교육·돌봄·식품안전처럼 외부효과가 크고 최소표준이 필요한 영역에서 현물·서비스 제공은 남용을 억제하고 품질을 보장한다. 다만 관료적 독점은 X-비능률을 부른다. 표준화의 편의가 개인화의 필요를 짓누를 때, 비용은 장부 밖에서 불어난다.
바우처는 이 딜레마 사이의 중도(中道)다. 용도를 제한하되 선택을 허용한다. 식품 바우처는 술을 배제하면서도 식품군 내 선택을 열어둔다. 교육 바우처는 공공적 목표를 전제하고 학교들 사이 경쟁을 촉진한다. 목표 일치성과 선택의 자유를 절충하는 아름다운 장치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선 음성거래와 표적효율성 저하라는 그늘도 있다. 관료제는 바우처를 불편해하고, 시장은 종종 그 빈틈을 가격으로 환수한다. 그래서 바우처의 성패는 기술적 세부—인증·추적·부정수급 제재·정보제공—에 달린다.
급여는 물건과 돈만이 아니다. 기회 자체를 급여로 설계할 수도 있다. 입학전형의 가산점, 직업훈련의 할당, 채용에서의 보정은 “동일한 출발선”을 구성하는 제도적 장치다. 잘 설계하면 사회적 이동성을 키우는 강한 사다리가 되지만, 불투명하게 운용하면 새로운 특권의 통로가 된다. 마지막으로, 정책과정에의 참여는 ‘절차적 급여’다. 정보 제공·의견 수렴을 넘어 공동 설계와 공동 집행, 피드백에 의한 즉각적 조정이 가능해질 때, 복지는 서비스가 아니라 관계가 된다. 시민의 참여는 제도의 품질관리이자, 납세자-수혜자 균열을 메우는 정치적 접착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원리의 선악 심판이 아니라 “조건부 최적화”다. 어느 사회든 네 가지 계산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첫째, 낙인의 사회심리적 비용과 선별의 행정비용을 보편의 재정비용과 비교하라. 둘째, 현금의 자유가 실제 효용으로 변환될 가능성을 영역별로 추정하라—시장구조, 정보비용, 수혜자의 의사결정 역량을 변수로. 셋째, 현물의 표준화를 개인화로 보완할 장치를 설계하라—개별 예산(personal budget), 서비스 바스켓, 품질평가의 공개가 그 예다. 넷째, 바우처의 누수를 기술로 줄이고(디지털 인증, 실시간 거래추적), 정보의 비대칭을 ‘선택을 돕는 플랫폼’으로 메워라.
윤리는 방향을 주고, 계산은 속도를 정한다. 보편과 선별은 도덕의 대립항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변수다. 급여형태의 선택은 이념적 표식이 아니라 정책공학의 문제다. 어느 도시의 교통이 그렇듯, 복지의 교통체계도 환승이 부드럽고 정시성이 높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현물에, 구직자는 바우처에, 노인은 현금에 더 잘 반응할 수 있다. 같은 사람도 생애주기에 따라 최적의 조합이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한 방의 해법’을 의심하고 ‘유연한 묶음’을 설계해야 한다.
결국 복지 설계의 미덕은, 가장 약한 사람을 기준점에 두면서도 전체의 신뢰를 잃지 않는 데 있다. 그 신뢰는 투명한 기준, 예측 가능한 갱신, 품질의 공개, 참여의 제도화에서 온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은 차갑지만, 그 해답은 따뜻해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언제든 취약해질 수 있고, 그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미래에 투자한다. 복지는 그 투자의 사회적 형태다. 어느 날 내게 돌아올지도 모를 도움을 지금 타인의 이름으로 설계하는 일—그것이 복지국가가 매일 갱신해야 하는 품격이다.
비회원은 댓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로그인 후에 바로 열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