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누군가의 부엌등이 꺼지고, 전기요금 고지서가 마지막 경고로 변한 뒤에야, 우리는 그 집 문 앞에 국가의 명패를 들고 선다. 송파에서, 또 다른 도시에서 반복된 비극은 우리에게 질문을 남겼다. 왜 우리는 늘 애도의 언어로만 복지를 말하게 되었는가. 사회복지정책의 첫 장을 빈곤으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빈곤은 제도의 실패를 가장 먼저, 가장 잔혹하게 드러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탄생하던 초입, 울타리 하나가 공동체를 갈랐다. 인클로저는 토지를 개별 재산으로 만들었고, 사람을 도시의 잉여로 만들었다. 그 이후 가난은 개인의 덕성과 근면으로 설명될 수 없는 차원을 품게 되었다. 찰스 부스가 런던의 골목을 걸으며 통계로 증명한 사실, 웹 부부가 보고서로 정식화한 관점, 베버리지가 제도 설계로 밀어 올린 발상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모아진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빈곤의 정의가 간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무엇인지, 그 욕구가 어느 수준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사회는 늘 논쟁한다. 절대적 빈곤은 생존선 아래로 떨어진 상태를 뜻한다. 상대적 빈곤은 사회 평균의 삶을 기준으로 느끼는 결핍을 말한다. 주관적 빈곤은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가늠하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박탈과 사회적 배제라는 이름이 더해지며, 빈곤은 다차원적 경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제대로 먹고 입는 문제를 넘어, 모임에 초대받지 못하고, 표준적 생애 경로에서 배제되고, 공론장의 언어에서 지워지는 것—이 또한 빈곤이다.
공공부조는 이 다층의 결핍에 대한 사회의 최소 답변이다. 비기여, 곧 세금으로 운영되는 제도이며, 자산조사를 통해 선별한다. 최저선 아래로 떨어진 이들을 다시 선 위로 올려놓겠다는 안전망의 약속이 핵심이다. 동시에 이 약속이 실제 현장에서 낙인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섬세함이 제도의 품격을 가른다. ‘가난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불쌍함의 문턱에 세운다. 신청서의 칸칸이 삶 전체를 빈곤이라는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 굴욕을 강요한다. 제도의 선의가 인간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법은 이를 바로잡으려 움직여 왔다. 생활보호에서 ‘보호’를 지우고, 국민기초생활 ‘보장’으로 바꾼 것은 상징 이상의 전환이었다. 시혜에서 권리로, 동정에서 시민권으로의 이동이었다. 부양의무제의 단계적 폐지는 오랫동안 지적된 구조적 사각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법의 문장이 곧 현실이 되는 일은 드물다. 제도의 관성, 행정의 절차, 재정의 협소함이 변화를 더디게 한다. 무엇보다도 ‘선별’의 철학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매번 문턱을 높이거나 낮추는 기술에만 매달리게 된다. 문턱의 높낮이가 아니라, 누구도 문밖에 서지 않게 하는 배치 자체를 재설계할 상상력이 필요하다.
빈곤을 보는 시선은 정책의 내용을 바꾼다. 가난을 운명으로 보는 관점은 순응을 요구하고, 자선을 대체재로 둔다. 가난을 죄로 보는 관점은 도덕적 훈계를 동원해 근면과 자조를 처방한다. 가난을 사회의 책임으로 보는 관점은 권리를 주장하고, 연대를 설계한다. 같은 동사—지원한다—를 쓰더라도, 그 철학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자선조직협회의 방문은 선심의 질서를 재생산하지만, 임보관 운동의 공동체 조직은 권리의 언어를 학습시킨다. 어느 쪽이 빈곤을 줄이고, 어느 쪽이 빈곤을 관리하는가. 답은 이미 역사 속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공공부조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제도는 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사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행정정보의 빈틈, 가족관계의 법적 형식과 실제 생활의 괴리, 의료비와 돌봄비 같은 대형 위험의 비대칭이 사람들을 다시 경계선 밖으로 밀어낸다. 지원은 종종 늦게 도착하고, 작은 방의 생활은 더 작아진다. 제도 설계자는 늘 “남용”을 걱정하지만, 현장의 현실은 “미달”이 더 흔하다. 남용의 상상은 강경한 심사를 낳고, 강경한 심사는 절실한 사람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도덕적 해이의 공포보다, 도덕적 무력감이 제도를 소진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술이 아닌 정치의 언어로 돌아와야 한다.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선택이다. 무엇을 ‘최저’로 인정할 것인가,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그 기준을 보편으로 만들 의지가 있는가. 이것은 회계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다. 정책은 언제나 철학의 변종이다. 철학 없는 기술은 절차를 키우고, 절차는 사람을 잊는다. 반대로, 철학이 기술을 억압해서도 안 된다. 권리의 언어는 예산과 공정성의 문법 안에서만 실현된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추상적 선의가 아니라, 정밀한 설계이다. 표준화된 기준 위에, 현장을 신뢰하는 재량을 얹고, 결과를 공개적으로 평가하여 학습으로 환류하는 선순환 말이다.
더 근본적인 대답은 지원책에서 해결책으로의 전환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잘 돕는 방법만을 연구하는 사회는 결국 가난을 오래 보존한다. 가난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사회가 진짜 사회국가이다. 최저임금과 근로조건, 돌봄의 공공성, 주거의 안정, 교육의 불평등, 보건의 접근성—이 영역에서의 보편적 토대가 공공부조의 수요를 줄인다. 복지부의 지원 강화보다, 사회 각 부의 예방적 설계가 더 큰 효과를 낸다. 복지는 어느 한 부처의 일이 아니라, 국가 운영 전체의 문장이다.
결국, 복지정책의 품격은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책임진다.” 이 말이 관청의 구호가 아니라, 동네의 일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비극의 반복이 멈춘다. 현금급여는 온도를 올리고, 주거급여는 벽을 세우고, 의료급여는 숨을 잇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뒤에서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배치이다. 낙인을 대신하는 존중의 태도, 의심을 대신하는 신뢰의 절차, 지연을 대신하는 자동의 제도, 그리고 데이터가 말하는 것을 곧장 고치는 용기. 이 네 가지가 모일 때, 공공부조는 최소가 아니라 기준이 된다.
우리는 애도의 문장으로 정책을 쓰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지원의 정교화만이 아니라, 불평등의 구조를 뜯어고치는 상상과 실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복지정책을 공부한다는 것은 제도의 카탈로그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인간을 배우고, 공동체의 책임을 다시 문장화하는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지원이 아닌 해결로, 사후가 아닌 예방으로, 시혜가 아닌 권리로. 그것이 반복을 끝내는 유일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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