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잿더미에서 원조로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개발국가가 속도를 올리자 일자리가 늘었고,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한 복지가 골격을 세웠다. 그러나 골격은 곧 벽이 되었다. 기업 안쪽의 노동자는 두터워졌지만 그 바깥은 바람이 셌다. 민주화는 문을 열었고, 사회보험과 기초생활보장은 권리의 언어를 배웠다. 그럼에도 불평등은 더 촘촘해졌고, 복지는 제도화되면서 동시에 층위를 만들었다. 누구는 혜택을, 누구는 대기표를 받았다.
우리가 배운 것은 간단하다. 어떤 정권이었느냐보다 어떤 철학이었느냐가 복지의 모양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복지를 시장의 그림자에 세울 것인가, 시민의 권리에 기대어 세울 것인가. 문구로는 쉽게 합의된다. 현실은 숫자와 선별, 제출서류와 증빙의 미로다. 의료급여 창구에서 과거의 상처를 증명하라 요구받는 이들이 발길을 돌릴 때, 제도는 존재하지만 권리는 부재한다.
한국 사회는 이제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속도가 문제다. 다른 나라가 수십 년에 걸쳐 겪은 변화를 우리는 몇 년 만에 통과한다. 노인 빈곤과 고립, 파산과 우울, 이 모든 통계의 뒤에는 이름이 있다. 이때 연금은 선택이 아니라 약속이다. 더 내자고만 요구하는 개혁은 절반의 문장이다. 국가는 자기 몫의 동사를 함께 써야 한다. 부담을 나누고, 사각을 메우고, 사후가 아니라 사전에 소득을 지탱하는 구조로 옮겨야 한다.
사회서비스의 언어도 바뀌어야 한다. 도움을 주는 손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기술로. 바우처가 선택을 넓힌 자리에서 민영화는 효율을 속삭이고, 공공은 공정과 안정성을 말한다. 어느 편이 옳다고 서둘러 말하기 쉽지만, 더 근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누구도 시장에서 탈락하지 않게 할 최소의 바닥을 어디에, 어떻게 깔 것인가. 공공의 책임을 얇게 펴서 모두가 미끄러지게 할 것인가, 두텁게 겹쳐 누구도 빠지지 않게 할 것인가.
보편과 선별의 논쟁도 마찬가지다. 정책의 철학으로서 보편은 방향이다. 위험이 오면 누구나 기댈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 그 위에서 구체적 제도는 대상과 상황에 맞춘 합리적 기준을 설계할 수 있다. 다만 기준이 소득 하나로 수축될 때, 보편은 껍데기가 된다. 우리는 그 지점을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행정의 간명함이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역사를 훑고 현재를 지나 미래를 상상해 보면 결국 주어는 같다. 시민이다. 공약과 예산, 조직 개편은 모두 동사일 뿐이다. 누가 그 동사를 선택하고 수정하고 폐기하는가가 문장의 의미를 바꾼다. 사회서비스원이 사라질 때, 연금 개혁이 반쪽으로 기울 때, 무상급식이 표적화로 되돌아갈 때, 그 변화의 이름이 효율인지 후퇴인지는 거리의 목소리와 생활의 체감에서 판가름 난다.
그래서 공부는 지식이 아니라 시력이다. 역사에서 기준점을 찾고, 숫자 속 빈칸을 읽고, 창구 앞에서 돌아서는 사람을 떠올리는 힘. 그 힘이 쌓일 때 정책은 전문가의 문서가 아니라 시민의 문장이 된다. 복지는 제도가 아니다. 사회를 만지는 손이다. 더 두텁고, 더 따뜻하고, 더 오래 가는 손. 그 손을 누가 뻗을 것인가. 우리다.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