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는 중립이 없다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 철학이 방향을 고르고 세력이 속도를 정하고 시민이 목적지를 정한다.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이 문장은 구호가 아니라 안내문이 된다. 누가 정책을 만들고 운영하며 바꾸는가를 묻는 일, 그 물음이 사회복지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민영화냐 공공성이냐는 오래된 논쟁이지만 질문은 새롭다. 더 싼가가 아니라 더 안전한가, 공급자의 편의가 아니라 이용자의 존엄인가. 시장의 활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람이 서류 앞에서 꺾이는 모습을 본 이들은 안다. 선택이란 전제가 권리의 바닥을 튼튼히 깔아두었을 때에만 진짜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사회서비스의 공공 인프라는 비용이 아니라 기반이다. 흔들리는 기반 위에서는 어떤 선택도 자유가 되지 못한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세계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팬데믹과 기후위기, 초고령 사회가 동시에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가 무엇으로 서로를 지탱할지 묻는다. 돌봄은 따뜻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노동과 재정의 재배치다. 서로를 보살피는 일상에 사회가 제도라는 등받이를 덧대는 일이다. 성장의 그래프가 잠시 숨을 고르는 시대라면, 복지는 더 느리게가 아니라 더 깊게를 선택해야 한다. 빠름의 논리로는 지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책은 문서로 시작해 현장에서 완성된다. 완성의 주어가 사회복지사라는 점을 잊지 말자. 오랫동안 우리는 지침을 해석하고 사례를 관리하며 당장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몰두해왔다. 그 헌신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창구에서 만난 절박이 제도의 결함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는 사람, 위원회에서 현장의 언어를 법의 문장으로 바꾸는 사람, 연대의 자리를 만들고 채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여야 한다. 실천은 손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질문으로 시작해 구조로 도착하는 길, 그 길의 이름을 우리는 '프락시스'라고 배웠다.
연대는 거창하지 않다. 현장의 동료와 지역의 시민모임, 노조와 단체, 당사자 조직이 서로의 문을 자주 열어두는 일에서 출발한다. 노동조합이 머리띠의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사이, 수많은 위원회와 협의체에서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노동자의 목소리가 없으면 결정은 중립을 가장한 기울기가 된다. 대표성은 참여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복지사의 처우를 말하려면 사회복지사가 스스로 대표로 서야 한다. 처우의 문제는 곧 서비스의 질이며, 서비스의 질은 곧 시민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배웠다. 권리는 투쟁의 언어로 태어나 제도의 언어로 자란다. 국민기초생활보장이 그랬고, 사회보험이 그랬다. 한때 불가능해 보였던 문이 열렸던 순간마다, 강단의 논문과 거리의 목소리가 서로를 붙들었다. 그 기억은 다음 문을 두드릴 우리의 근거가 된다. 연금의 지속 가능성, 돌봄의 사회화, 사회서비스 인력의 권리, 지역 기반의 전달체계, 이 모든 과제는 기술적 세부를 넘어 정치적 선택이다. 선택의 방향은 숫자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숫자 뒤의 얼굴을 오래 떠올릴 때 비로소 길이 보인다.
세상은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자주 조용히 변한다. 질문이 쌓이고, 토론이 이어지고, 작은 조직들이 서로 얽히고,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고, 어느 날 문턱이 낮아진다. 그 변화가 가능하려면 공부가 시력이 되어야 한다. 현상의 표면을 넘어 구조를 보고, 정책의 단어에서 철학을 읽고, 절차 속 권력의 흐름을 가늠하는 눈. 그 눈으로 우리는 현실을 드러내고 의미를 묻고 대안을 설계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지금,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현장에서 의미를 묻고, 동료와 손을 맞잡고, 시민과 언어를 나누고, 제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복지는 제도가 아니다. 사회를 지탱하는 손이다. 더 두텁고, 더 따뜻하고, 더 오래 가는 손. 그 손을 오늘 우리가 먼저 내밀면 된다. 우리 안의 시민이 정책의 주어가 될 때, 복지의 문장은 비로소 완성된다.